태국과 베트남을 오간 120일의 여행기 중 '사랑'을 주제로 한 유일한 에피소드로, 방랑의 기록을 써가던 내가 사랑을 주제로 여행기를 쓸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직장에서의 트러블과 이별을 동시에 겪곤 버티지 못해 떠난 여행에 이 감정을 품는 건 사치라 생각했다. 과거를 잊고 삼키기에 시간이 필요했고 여행기에 모두 소개할 수는 없으나, 태국에서는 이성 감정에 대한 유혹을 모두 이겨내고 욕구를 억제하며 오직 '나'에 대한 탐험에만 집중했었다. 굳이 이럴 필요까진 있을까 싶지만 나는 그랬어야만 했다.
하지만 하노이에서 완벽하게 무너졌다. 과거에 발목 잡혀 가슴앓이하던 모습도 함께 무너진 건 그나마 다행일는지. 그러나 여행의 온도가 달라졌고 덕분에 앞으로의 행보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 출발은 부채춤을 추는 베트남 여인을 만나며 시작된다. 옆에 있는 모든 세계보다 더욱 밝은 감정을 품었던 소중한 사연을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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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안끼엠 호수(Hồ Hoàn Kiếm) 주변, 특히 북쪽 지역을 하노이 여행자 거리라 부르는데 교통통제가 이뤄지는 도로의 작은 무대에서 베트남 전통공연이 한창이었다. 식사 후 여전히 베트남 분위기에 적응 중인 내게 전통공연은 그야말로 최고의 볼거리 중 하나였다. 몇몇의 남녀 출연자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며 전통악기를 연주한다. 나는 베트남인들 사이에 섞여 공연을 보고 있었다.
무대 위의 여러 출연자 중 유독 한 여인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부채를 들고 묘한 분위기를 뿜어내며 춤을 추는 그녀에게 한순간에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여행중 처음 경험해본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손짓 하나하나에 신비로움 마저 느껴진다. 내 입은 오자 모양으로 벌어지고 심장은 뒤죽박죽 뛰기 시작한다. 뜻하지 않은 단편적인 감정을 확인하기 위해 그녀에게만 시선을 맞추고 공연을 이어 보았다.
공연이 끝나도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고백하지만 출연자 대기실 앞에 서서 그녀가 나오길 기다린 건 정말 내 의지가 아니었다. '어느덧'이란 표현이 옳다. 어느덧 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여행 중 처음 느낀 감정으로 나 자신의 어색한 행동에 이대로라면 모든 게 엉망이 될 거란 공포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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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에게 현지의 전통 공연은 최고의 볼거리 중 하나다. 문득 인사동에서 펼쳐지는 한국의 전통공연이 얼만 중요한 컨텐츠인지 깨닫게 된 좋은 경험이었다.@super-traveler.com
곧 편한 복장으로 나오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여행 중인 한국인이며 오늘 처음 베트남에 왔고 공연 소감을 말도 안 되는 영어와 갓 익힌 인사 수준의 베트남어를 섞어 허둥대며 이야기했다. 도대체 내가 뭐라 말하는지 의식은 촌스러운 멘트를 그만 남발하라 주문하지만, 몸은 따르질 않는다. 다행인 건 나를 경계하지 않고 미소로 화답을 하는 그녀다.
커피를 사고 싶다는 내 부탁에 그녀는 흔쾌히 응했고 함께 노점에 앉아 나눈 몇십분의 대화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수줍음이 많지만 미소 지을 때는 어찌나 아름다운지 이 순간이 내내 믿어지지 않는다. 처음 하노이에 도착했을 때 느낀 힘듦이 모두 잊혀진다. 대학생이며 공연을 전문적으로 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우리는 하노이와 서울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다.
지금에 와서 후회되지만 이때 고백을 했었어야 했다.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첫눈에 빠지는데 많은 이유가 필요 없다는 걸 적극적으로 어필하고 알렸어야 했다. 심적 각오는 베트남에서 남은 체류 기간을 그녀를 알기 위해 모두 쓰고 한국으로 돌아가 금세 다시 오고 싶을 정도로 선명한 감정이 밀려온다. 그러나 평소 이성 앞에서 말을 그리 잘하면서 왜인지 말문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실수는 이어진다. 페이스북으로 연락하고 싶다는 내게 자신의 이름을 적어준다. 그 자리에서 친구신청을 해야 했는데 숙소로 돌아와 찾아보니 동명이인이 너무 많은 것이다. 페이스북 앱을 보여주지 않고 메모장 앱을 화면에 띄우고 이름을 알려달라 건넨 멍청한 나다. 여행 중 중요한 내용은 메모장 앱에 기록하던 습관 때문이었는데 두고두고 후회했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이쯤에서 그녀를 보내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자신 있게 페이스북으로 연락하겠다 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국, 나는 매일 공연을 보러 갔다. 베트남의 수많은 멋진 여행지를 뒤로하고 하노이를 떠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진을 블러처리 해서 올리는 점 양해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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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며칠 후 한 출연자에게 그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소식을 물어보니 공연을 더는 하지 않는다고 한다. 서로의 짧은 영어로 나눈 대화라 정확히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시험을 앞두고 잠시 공부에 매진하고 있다는 뜻으로 들려온다. 나는 동료에게 그녀의 연락처를 물어보진 않았다. 용기가 나지 않았던 건지, 인연이 여기까지였음을 인정한 것인지, 페이스북의 동명이인 중 그녀를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거란 철없는 확신 때문인지 핑계는 제각각이다.
서른 중반 나이에 다양한 이성을 경험했지만, 첫눈에반한 건 오직 세 번뿐이었다. 하나는 초등학교 5학년때였고 두번째는 20대때, 나머지 하나가 베트남 여인이란 건 참 흥미로운 일아니겠냐만.
베트남을 떠나 다시 태국으로 돌아와 여행을 이어갔지만, 한동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속앓이를 해야 했다.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공연 동영상을 보며 그리워하다가 다시 베트남에 가서 운명을 걸어볼까 따위의 생각들로 시간을 보냈다. 그녀 덕분에 여행에 온기가 스며들어 제법 괜찮은 여행을 이어갔지만 정작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지 못한 상황이 안타깝기만 하다.
베트남은 어땠냐는 친구들의 질문에 미묘한 표정으로 한숨부터 내쉬었던 비밀을 이렇게 고백을 해본다.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애틋한 감정이 든다. 서울에서 온 보통남자의 서툰 모습도 따뜻이 대해준 그녀의 앞날에 행운을 걸어본다.
하노이 여인 Vân Anh 못 잊을 이름이다.
설레임과 후회를 동시에 머금고 하노이에서 첫날을 비아하노이로 마무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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